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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지금은 폐역이지만 '혼불'의 숨결이 살아있는, 남원 서도역
  • 등록자철도신문
  • 등록일2017.03.23
  • 조회수799
지금은 폐역이지만 '혼불'의 숨결이 살아있는, 남원 서도역



▲끊어진 철로와 서도역사


숨 끊긴 서도역은 살아있었다
한 컷의 시간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사람 대신 찾아오는 바람이며
잔뜩 손때 묻은 대합실 문잡이이며
사랑한다는 낙서며 덜렁거리는 나무조각이며
조금은 쓸쓸할 것 같은 들꽃 몇 송이이며
잡풀에 갇힌 녹슨 철길이며
덩그러니 선 기다림의 신호대며 모두가
사람의 혼불을 피우고 있었다
서도역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 서도역 한 컷. 박명용

남원 사매면 구 서도역사 안에 걸려있는 액자에 서도역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제처럼 서도역 한 컷을 잘 담아 놓았다.
만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로지 한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숨을 거두기 전 산소 호흡기를 쓴 채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 의미를 일축한다.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으로 잘 살고 갑니다."



▲노적봉을 병풍삼아 자리한 혼불문학관


▲혼불문학관 내부

작가 최명희는 〈혼불〉 완간 4개월을 앞두고 난소암에 결렸으나 주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오로지 집필에만 매달린 끝에 1996년 12월 완간, 2년 뒤인 1998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작가가 떠난 뒤, 각계 인사들이 모여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이 결성되었고, 1999년에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에 작가를 기리는 문학마을인 ‘혼불마을’이 조성되었다. 서도역은 혼불문학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소설 속에서 ‘매안역’으로 등장하는 서도역(書道驛)은 1934년에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소설속에서 묘사되었듯이 주인공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올 때 기차에서 내리던 곳이며 강모가 전주로 학교 다니면서 이용하던 장소이기도 해 한때는 남원 못지않은 성황을 누리기도 했단다.


▲서도역 전경

2002년 전라선 철도 이설로 신역사를 준공해서 이전하였으나 이곳은 1932년 준공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혼불문학마을과 더불어 중요한 문화적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역사(驛舍)는 지금도 나무로 만들어진 옛 모습 그대로여서 간이역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역 광장의 느티나무는 서도역의 역사(歷史)를 말해주듯이 의연하게 서있다.
‘수촌마을 입구에는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옛날 사포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쉬다가 지팡이를 꽂아놓고 간 것이 느티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철길 따라 걷다가 만나게 되는 푯말 속 사포정의 전설이 연상되는 고목이다.
역사 뜰에는 작가탑이 세워져 있고 양 옆으로 병풍처럼 2개의 벽이 세워져 노적봉과 〈혼불〉에 나오는 거멍굴 사람들의 모습이 광장 풍경과 어우러져있다.
‘꽤 오래된 길이 구불구불 하얗게 벋어 오다가 평평하게 화악 퍼지면서 둥그러미를 이룬 곳이 고리배미였다.’
녹슨 철길을 따라 가다 보면 소설 속 구절들과 장소들에 대한 푯말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어 마치 소설 속 어느 한 순간과 공간에 머무는 듯하다.


▲소설 속 테마 조형물

철길의 끝을 돌아나오면 소설 속 테마들을 모티브로 한 설치조형물로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타를 치며 꿈을 꾸는 강모, 혼례를 올리는 모습, 신랑 다루기 등 소설 속 대목들을 테마로 한 조형물들이 소설 속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전주에서 자라고 학업을 마쳤지만 고향인 동시에 부모님의 집이 있는 서도리 노봉마을에 방학 때마다 내려와 지냈다고 한다. 혼불의 주인공 청암부인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 작가의 고향인 이곳에 문학관을 개관한 이유다. 문학관 외벽에는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풍습과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작가와 소설 속 세계가 펼쳐져 있다. 작가의 집필실이 재현되어 있고, 소설 속 장면들을 재현한 전시물들로 그 시대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혼불은 우리 몸 안의 불덩어리다.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목숨의 불’ 이자 ‘정신의 불’ 이다. 51세의 젊은 생을 접고 저 세상으로 떠난 작가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갚을 길도 없이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 어지럽게 쌓아 놓은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 은 나도 어찌하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의 고백이 만 17년 동안 원고지 1만 2천장을 만년필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 이루어낸 〈혼불〉과 글쓰기에 대한 심상을 느끼게 한다.


▲청호저수지

소설의 무대인 최씨 종가와 청호 저수지, 달맞이 공원을 한 바퀴 돌아나오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1980년 봄 "그다지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다."로 시작해서 1996년 겨울 "온 몸에 눈물이 차 오른다."로 끝낸 대하예술소설.
만년필 한 자루에 온몸을 의지하여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심정'으로 써내려 갔다는 〈혼불〉의 작가 최명희.
작가는 어느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람이 좋다."
그 말처럼 그는 〈혼불〉을 통해 사람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 이라고 했던 작가의 말을 떠올린다.
글을 읽고, 문장으로 써내려 가다 보면 무의미하고 허허로운 일상도 또 다른 의미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언어가 주는 힘이기도 하다.
청호저수지를 지나 노적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정표처럼 작품 속 구절들이 길목마다 놓여있어 산길을 오르는 내내 자연이 주는 넉넉함과 더불어 문학의 혼으로 채울 수 있는 덤이 있기에 이 곳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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