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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철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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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박기종(朴琪淙)
  • 국적조선
  • 직업사업가
박기종상민계층 출신으로서 일찍부터 상업에 종사, 주로 일본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력이 계기가 되어 1876년 5월 김기수(金綺秀)를 수반으로 하는 제1차수신사일행의 일본시찰여행 때 역관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의 각종 산업시설과 제도 등의 근대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뒤에 우리나라의 산업개발을 위한 철도건설사업과 교육제도의 근대화 내지 진흥에도 진력하게 된 것 같다.

일본시찰 때 역관의 관직을 얻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귀국 후 계속하여 각종 관직을 거치면서 부산 경무관의 관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시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신문화교육의 진흥에 대한 소망의 일단을 실현하기 위하여 1896년 3월 부산상업학교의 전신인 부산개성학교를 창설하고 주로 기술과 일어교육에 힘썼다.

또한, 당시 철도부설권 획득을 위하여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치열한 경합의 와중에서 평생소원이었던 철도건설사업의 실현을 위하여 1898년 5월 한국 최초의 민간철도회사인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창설하였다.

부하철도회사는 부산과 하단포(下端浦)를 연결하는 철도부설을 목적으로 설립된 것으로서 일명 하단철도라고도 하였다. 하단철도는 건설에 대한 강렬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자금부족·기타의 이유 등으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또다시 1899년 5월 대한철도회사를 설립하고 경원선·함경선의 부설허가를 얻어 건설사업을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력한 방해공작으로 부설권이 궁내부 직영으로 돌아가게 됨으로써 부득이 단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철도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영남지선철도회사(嶺南支線鐵道會社)를 창립하고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하는 삼마철도(三馬鐵道)의 부설권을 얻어 공사진행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집요한 농간으로 자금조달이 여의하지 못하여 끝내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평생을 통하여 철도부설에 뜻을 두었으며, 국내철도는 민족계 회사에 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일본의 침략이 날로 극심하여가는 상황이어서 그의 이와같은 높은 뜻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항상 국가중흥은 산업개발에 있다고 믿었고, 그와같은 신념의 실현을 위하여 큰아들은 일본의 광산학교, 둘째아들은 철도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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