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역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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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경전선과 역들(2) - 만수역, 석정리역, 평화역, 명봉역 | 2025.02.07 |
3 | 경전선과 역들(1) - 진성역, 양보역, 도림역, 구룡역 | 2025.01.31 |
2 | 장항선의 역사와 역들(2) - 오산리역, 삼산역, 임피역 | 2025.01.24 |
1 | 장항선의 역사와 역들(1) - 원죽역, 기동역, 선장역 | 2025.01.20 |
철도역과 지역 | |
경전선과 역들(2) - 만수역, 석정리역, 평화역, 명봉역 | 2025.02.07 |
5) 만수역 총연장 277.7km를 달리는 경전선에서도 화순~보성 구간은 유난히 역 간 거리가 짧고 규모 작은 간이역이 많다. 지석천을 따라 농사짓기 좋은 땅도 많았고, 1920년대 이후 강을 따라 철길이 들어서면서 광곡역과 도림역, 입교역, 석정리역, 만수역과 같이 그 유래와 형태가 불분명한 간이역들이 들어섰다. 2008년 이용률이 저조한 간이역 열차 운행을 중단하면서 만수역에 정차하던 통근 열차도 그냥 통과하기 시작했다. ![]() ▲ 만수역 역명판(2008년 폐역, 2005년 촬영) 경전선 만수역은 배후 여러 마을을 품고 있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어 가장 많은 승객이 이용한 해에도 연간 승하차 인원이 10만 명을 넘긴 적이 없었다. 1978년에도 연간 8만 명 내외에 불과하여 하루 이용객 250명 정도가 최고치였다. 이미 만수역 이용객은 1980년대 후반부터 하루 10명 이하로 급격히 줄기 시작했는데, 인접한 화순과 광주로 인구가 유출되고 화순~보성 간 국도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주민들도 굳이 열차를 타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만수역까지 올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 만수역의 겨울 ![]() ▲ 만수역 벽화 만수 역사(대매소)로 쓰였던 건물이 이색적이다. 건물 측면에 ‘만수’라는 명판이 단단히 붙어 2022년 1월 현재도 제 위치를 정확히 알리고 있고, 철길 방향에서 보면 과거 매표구로 썼을 것 같은 구멍을 판자로 막은 흔적이 보인다. 만수 역사에는 특별한 벽화가 하나 그려져 있는데, 철길 방향 한쪽 벽면 전체에 복숭아나무와 과일 바구니를 ‘만수 특산물’이라는 제목으로 그려 놓았다.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양각으로 일일이 콘크리트와 자갈 등을 섞어 복숭아나무에 입체감을 더했고, ‘만수특산물’ 글씨는 비슷한 크기의 조개를 하나하나 붙여 만들어놓았다. 벽화가 그려진 벽면이 철길 방향이어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볼 수도 없고 일반인이 우연히라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으니 오직 열차를 타고 가던 승객만이 만수역 방향으로 유심히 살펴봐야 만나는 귀한 작품이 되었다. 현재는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선로 주위로 펜스가 처져 있다. 만수역을 이용하던 주민들 다수는 인근 화순이나 광주 등으로 옮겼고, 현재의 주민들은 마을버스를 이용하여 광주, 화순, 보성 등지로 다니거나 자가용을 이용하고 있다. 6) 석정리역 서부 경전선 화순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정리역이라는 이름 좋은 간이역이 있다. 1932년 영업을 시작하여 1979년에는 하루 승하차 인원이 500명을 넘어설 만큼 많은 이용객을 보유하던 곳이다. 그러다 최근 2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급속도로 위축되어 2008년 1월 1일 간이역에서 폐역이 되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용객 규모가 감소한 것은 춘양면을 관통하는 29번 국도의 개통과 확장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주변 도시로의 이동이 쉬워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 석정리역 역명판(2008년 폐역) 원래 이곳은 화순군 춘양면에 속해 있어서 역명도 춘양역이었는데, 1955년 영동선 춘양역과의 혼동을 피해 석정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봉화군 춘양면의 규모와 위세가 화순군 춘양면보다 더 셌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65년이 지난 지금은 석정리역도 폐역되었으니 더는 혼동되는 일도 없다. ![]() ▲ 석정리역 석정리역의 모습은 책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윤주영 작가의 사진 에세이 《석정리역의 어머니들》에서 매일 아침 비둘기호를 타고 남광주역 앞 반짝 시장으로 채소와 과일을 팔러 다니던 어머니들의 모습이 흑백사진으로 생생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나 더, 아침마다 석정리역을 찾아오는 안개가 책에 녹아들어 있다. ![]() ▲ 석정리역을 통과하는 열차 15년 전 그날도 안개를 뚫고 통근 열차가 왔고, 열차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렸다. 보기에도 무거운 고무대야 두 개를 열차에서 끌어낸 후에야 열차는 떠났다. 아주머니는 매일같이 벌교에서 꼬막과 생선을 싣고 와 춘양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석정리역에서 내렸다고 한다.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을 또 한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장사는 잘 되시냐고……. “괜찮다.”며 “오늘 얼른 다 팔고 오후 기차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라는 아주머니의 무표정한 모습은 강하고 아름다웠다. 아주 짧은 시간 쉬었다가 기막힌 솜씨로 두 개의 고무대야를 머리에 훌쩍이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시장을 향해 힘차게 출발하신다. 7) 평화역 평화역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에 위치한 경전선의 간이역으로, 1967년 2월 배치 간이역으로 개업했다가 2년 만에 무인화와 함께 을종 대매소로 지정되었다. 역명 유래도 인근 마을 이름인 ‘평화마을’의 명칭을 그대로 따서 자연스럽게 평화역이 되었다. 1978년부터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전환하여 2002년 12월 20일 폐역되었고, 역사도 철거되었다. 이용객 감소는 순천시의 확장과 버스 교통의 발달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 ▲ 옛 평화역 모습(2002년 폐역으로 철거) 평화역은 폐역 이후에도 짧은 기간 적지 않은 여행자들이 다녀갔다. 오로지 역명 때문에 입소문을 타고 ‘평화역’이라는 과거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 그 이름만 듣고 역 터를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무원도 존재하지 않고 여객영업 집계표에도 잡히지 않으니 도무지 그동안 몇 명이나 찾아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인터넷 검색창에서 ‘평화역’으로 검색하면 한때 200여 건이나 되는 포스트 검색 결과가 나올 정도였다. ![]() ▲ 가로등이 있는 평화역 터 봄이면 플랫폼 주위로 유채꽃이 피고, 가을이면 주위 건널목에 백일홍이 꽃을 피우는 공간, 역사(驛舍) 한쪽에 자라던 역목(驛木)은 남아 그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철도역 터가 아니었다면 그 자체로 눈에 띄는 풍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역명을 활용한 관광지화의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폐선된 홋카이도 히로오선의 ‘애국(愛國)역’이나 ‘행복(幸福)역’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 ▲ 공원이 된 평화역 터(2022년 1월 촬영) 2002년 역사 철거 이후 플랫폼과 구내 가로등 세 개가 그대로 남아 역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현재의 역 터는 경전선 복선전철화 이후 시민들의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고, 인근 위치에 경전선과 전라선 신호 제어를 위한 평화 신호장이 새로 지어졌다.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간이역이지만, 삶이 팍팍해질수록 평화를 찾는 수요는 늘어날 것이고 역 터를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찾는 쉼터로 꾸민다든지 역명판을 새롭게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명봉역 명봉마을에 철도가 깔리고 명봉역이 들어서서 기차가 서기 시작하면서 마을 규모도 커졌고, 주변 광산의 개발로 또 한 번 발전을 거듭하여 1980년대 중반에는 하루 평균 400~500명이 이용하는 분주한 역이 되었다. 그러다 폐광과 농촌 인구 감소로 다시 이용객이 줄어들어 이제는 하루 10명 이하가 이용하는 작은 역으로 남았다. ![]() ▲ 명봉역과 역명판 ![]() ▲ 명봉역 구내와 주변 마을 역사는 붉은 벽돌을 사용한 1950년대 건축물로서 한국에서 몇 남지 않은 6·25전쟁 직후의 역사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어 한국철도공사가 지정한 준철도 기념물로 등재되었다. 역 구내에서 보면 상하행선 모두 곡선이어서 TV나 드라마 촬영 시 극적인 효과를 더하는 장소로도 자주 쓰였다. ![]() ▲ 명봉역의 벽화와 작은 광장 이용객 감소를 거듭하던 2003년에 명봉역이 다시 한번 주목받는 일이 있었는데, 매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여름 향기’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이별하는 장면을 명봉역에서 촬영하면서 적지 않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아온 것. 지금은 두 스타의 사인이 걸린 드라마 사진 몇 장이 전부지만, 여전히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경전선 명봉역은 지금도 여객열차가 정차하고 있고 역 구내도 잘 관리되고 있다. 철도를 좋아하고 명봉역을 아끼는 김동민 명예역장의 노력으로 역사 내부는 간이 철도 사진 전시관이 되었다. 역 광장에는 이 지역 출신 문정희 시인의 시비가 서 있고, 언제 가도 깔끔한 주변 환경이 반겨주는 간이역이 되어 지역신문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역 맞이방에 전시된 사진들은 명봉역 명예역장이 직접 찍은 명봉역과 서부 경전선의 사계절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사진들이어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간이역과 철도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는 명봉마을 인구가 많이 감소한 채 마을의 모습만 유지되고 있으나, 명봉역의 역사적인 가치와 역 구내의 경관 가치, 다양한 영상 제작 및 명예역장의 역사 가꾸기 노력 등을 종합하면 향후 철도문화유산으로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는 사례라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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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역과 지역 | |
경전선과 역들(1) - 진성역, 양보역, 도림역, 구룡역 | 2025.01.31 |
2. 경전선과 역들 1) 진성역 진성역은 1925년 진주선 개통 시기부터 운영되다가 1944년 잠시 폐지되었고, 1950년 다시 영업을 시작한 후 2012년 경전선 이설 및 복선화와 함께 폐역된 이력을 가진 곳이다. 소규모 역사이지만 자체 이설의 역사도 있다. 이용객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80년대 초반으로, 다른 지역 간이역보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85년까지 연 승하차 인원 8만 명대를 유지했다. 대매소가 있던 시절 진성역은 폐역 직전의 진성역보다 마산 방향으로 200m 정도 거리의 위치에 있었다. 구천마을 주민들의 이용 편의를 고려하여 대매소 취급중지 후 1990년대 언젠가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 ▲ 경전선 진성역(2012년 폐역, 2004년 촬영) ![]() ▲ 진성역에 진입하는 마지막 열차(2012년 촬영) 선로 이설 이후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된 지금은 노반이나 플랫폼 일부만이 남았다. 이설을 앞두고 만난 어르신들의 주요 목적지는 진주 또는 마산이었고, 오전 열차는 주로 마산장에 농산물을 팔기 위해 자주 이용하고, 오후에는 진주나 마산에서 가족을 만나거나 개인 약속이 있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진성역의 특징으로는 선로가 마을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는 점, 역전광장이 마을 중심광장과 동일한 곳에 있어 마을 주민의 쉼터가 되어왔다는 점, 도로 대비 철도교통이 우세였던 지역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성역도 양보역과 마찬가지로 경전선 이설과 함께 폐지된 경우이며, 현재는 버스와 택시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으니 그만큼 철도교통이 마을 주민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기도 하다. ![]() ▲ 이설 후 폐지된 진성역 주변 풍경(2013년 촬영) 2) 양보역 양보역은 이름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한자로는 어질고(良) 크다(甫)는 의미가 있으니 흔히 우리가 쓰는 ‘양보(讓步)’와도 어느 정도 맥이 통한다. 실제로 역명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사람을 적지 않게 만났고, 웹사이트를 검색하다 보면 막연히 이곳에서 양보의 미덕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믿음마저 가지고 있었다. ![]() ▲ 1986년 양보역, 《한국철도요람집》(2016년 폐역) 양보역 주변 서촌, 동촌, 피파마을, 하성마을 등은 다른 주변 지역보다 도로교통이 여전히 불편하여 2016년 폐지 직전까지도 매해 4,0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의 소중한 교통수단이 되어왔다. 1986년 《한국철도요람집》에 실린 양보역은 1967년에 지어진 인근 북천역과 동일한 모습의 규모 있는 크기였다. 1990년대 후반 본체가 철거되고 시설반 건물과 대한통운 사무실, 화물 홈 정도만 오랫동안 남아있다가 역 폐지 이후 나머지 시설물들도 빠르게 정리되었다. 현재는 하동 레일바이크 기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양보역은 이용객의 감소보다는 경전선이 이설되면서 역사도 함께 폐지된 경우라는 점에서 다른 간이역의 폐역 과정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도로교통이 불편한 편이고 주민들은 버스나 콜택시를 이용하여 인근 도시로 나가고 들어온다. ![]() ▲ 2006년 양보역 ![]() ▲ 양보역 역명판(2011년 촬영) ![]() ▲ 양보역을 통과하는 화물열차(2011년 촬영) ![]() ▲ 구 양보역 인근을 달리는 경전선 화물열차와 주변 마을(2013년 촬영) 3) 도림역 1936년 3월 무배치 간이역으로 영업 개시한 도림역은 1944년 6월 폐지되었다가 1963년 배치 간이역으로 승격, 1972년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 2006년 11월 일반 열차 통과, 2008년 최종 폐역된 기차역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송정리에 위치해 있었고, 전형적인 농촌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어주는 간이역이었다. 폐역된 뒤에도 소나무 한 그루와 버스정류장 형태의 간이역사가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오랫동안 이용되기도 했다. 도림역 맞이방에는 네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고, 역 뒤편에는 상호도 없이 ‘담배’ 팻말만 걸린 역전 상회가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가게는 영업을 했는데, 열차가 정차하지 않게 된 뒤로는 승객이 없어 가게 영업도 중단했다. 열차를 이용하던 승객들은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마을에서 국도까지 도보로 이동한 뒤 마을버스를 타고 화순이나 광주, 보성 방향으로 다녔다. ![]() ▲ 도림역과 주변(2008년 폐역) ![]() ▲ 도림역을 통과하는 열차(역전 상회 할머니의 모습) ![]() ▲ 도림역의 역명판 도림역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 간이역 사진촬영 장소로도 입소문이 났는데, 그 때문에 여객영업 중단 뒤에도 적지 않은 철도 마니아와 사진가, 자전거 여행객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이들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역전 상회 주인 할머니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오해를 풀었다는 뒷얘기가 있다. 여객열차가 더는 정차하지 않고 자동차, 버스 교통 위주의 지역으로 변화했지만 2000년대 초까지 경전선의 전형적인 농촌 간이역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4) 구룡역 같은 이름의 역이 수도권 분당선에도 있지만, 그보다 70년쯤 먼저 생긴 구룡역은 경전선 순천~보성 구간에 위치해 있었다. 1932년 무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고, 6·25 전후 영업 중지와 폐지의 기록이 있지만, 그 뒤로 다시 열차가 정차하고 2007년까지 운행한 간이역이다. ![]() ▲ [지도 23] 구룡역 위치도(1926년 지도) ![]() ▲ 구룡역의 역명판(2006년 폐역) 한 해 최대 승객수가 17만 명, 하루 평균 500명이 이용하던 시기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까지였는데, 이 시기는 다른 농어촌 간이역사의 활황기와도 일치한다. 지금은 그때 분위기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40년 전 농촌 마을과 역사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경전선 구룡역의 특징으로 영업 초기에는 구룡역에서 바다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30년대 초 제작된 지도를 보면 역 앞에 펼쳐진 평지를 지나면 바로 앞이 바다였다. 부족한 농지 확보를 위해 대규모 간척 사업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열차 시각표가 개정될 때마다 열차 운행횟수가 감소하였고, 2006년 10월 31일 통근 열차 정차를 끝으로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다. 현재는 주민들이 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순천이나 보성 방향 버스를 이용하고 있고, 역 터에는 플랫폼이나 역명판이 사라지고 펜스가 둘러쳐져 있어 사람의 접근도 불가능하다. ![]() ▲ 구룡역에 정차한 마지막 열차(20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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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선의 역사와 역들(2) - 오산리역, 삼산역, 임피역 | 2025.01.24 |
4) 오산리역 전북 익산시 오산면에 위치한 오산리역은 1931년 6월 15일 군산선 역으로 개업, 2008년 1월 1일 통근 열차 폐지로 열차가 더는 서지 않게 된 간이역이다. 마을 주변에는 논밭이 넓게 펼쳐져 있지만, 택시로 8분 거리에 익산역이 있어 시내 생활권이나 다름없다. 오산리역 이용객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1970~1980년대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는 연간 승하차 인원이 40만 명을 넘을 만큼 이용이 활발했는데, 이 마을 이용객이 가장 많았던 1979년은 하루 평균 1,280명 가까이 이용했던 기록이 있다. 2020년 폐역이 되었고 열차가 서지 않는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다. ![]() ▲ 오산리역(2008년 폐역) ![]() ▲ 오산리역을 통과하는 관광열차 이런 배경에는 5분이면 익산역에 도착할 수 있었던 통근 열차가 평균 2시간 단위로 다니고 있었고, 마을 중심부에 오산리역이 있어 익산 시내까지 접근하기 편리했던 철도교통 우위의 시기가 있었다. 도로교통이 빠르게 발달하고 노선버스와 콜택시가 주민들의 주요 이동수단이 되면서 대도시 가까운 마을 간이역의 역할은 빠르게 축소되었다. 이 때문에 오산리역이 폐지되던 2008년 직전에는 거동이 불편한 경로 승객 외에는 거의 이용하는 승객이 없었다. 철도 역사의 기능은 다 했지만,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고향 간이역이라는 추억의 상징으로 오산리역을 기억하고 있다. ![]() ▲ 오산리역 근처를 달리는 통근 열차 역사·문화적인 가치는 크지 않지만, 장항선(옛 군산선) 선로를 따라 봄이면 유채꽃, 여름이면 논밭과 조화를 이루는 경관이 뛰어나 동호인과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간이역이었다. 지금은 역 플랫폼 주위를 펜스로 막아놓아 진입할 수 없지만, 파란색 역명판은 아직 남아 이곳이 한때 기차역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역은 장항선 익산~대야 구간 선로 이설로 더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 공간으로 남았다. 5) 삼산역 장항선 삼산역은 옛 장항역(현 장항화물역)과 서천역 중간에 있는 간이역으로, 역이 위치한 삼산리 주민 외에 서천과 장항 사이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전형적인 농촌 간이역이었다. 특히 이설 전 서천역과는 1.7km 거리에 있어 도시발달과 함께 급속히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는 특징을 가졌고, 2004년 7월 이후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다. ![]() ▲ 이설 전의 삼산역(2006년 폐역) ![]() ▲ 서천을 출발하여 삼산역에 진입하는 열차(2006년 신선 공사 완료 이전) ![]() ▲ 신선 교각 완료 후의 삼산역(2006년) 장항선 개통 초기부터 영업을 시작했던 삼산역은 1943년 12월에 폐역된 적이 있다. 그만큼 마을 자체가 크지 않았고 이용객도 적어 간이역의 기능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되다가 2006년 폐역되었다. 많은 주민이 이용하던 1970년대 후반에도 하루 100명 이상은 이용하지 않는 작은 역이었고, 현재는 옆으로 장항선 선로가 이설되면서 고가화되어 역 터의 흔적이 거의 없다. 주민들의 기억에서도 빠르게 사라진 역이지만, 겨울이면 삼산~서천 선로 주변으로 철새들이 찾아와 S자 철길 위를 날아다니는 장면이 장관이었다. 일부 철도동호인들에게만 기억되는 작은 역이지만, 지금도 커다란 향나무 한 그루가 장항선 초기부터 지금까지 크게 자라나 철도 역사가 서 있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6) 임피역 임피역의 위치는 군산 선상에 있는데, 주소는 전북 군산시 임피면 서원석곡로 37이다. 연혁을 보면 1924년 6월 1일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36년 12월 1일 보통 역으로 승격 및 역사를 신축하였다. 2005년 11월 11일 근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8년 1월 1일 통근 열차 운행 중지와 새마을호가 1일 2회 정차하였으며, 2008년 5월 1일 여객 취급을 중지하였다. 1934년 《조선여행안내기》에서 주소는 전북 옥구군 서수면, 이리에서 7.8km, 군산에서 16.9km, 쌀 산출이 많은 지역에 위치한 간이역으로 나와 있다. 임피역에 대한 기록을 보면 《조선철도연선요람》(1927년)에서 1927년 역원배치 간이역이며, 발송화물은 쌀, 도착 화물은 조와 비료, 여객은 승차 인원 50,371명(1일 138명), 하차 인원 53,033명, 화물은 발송화물 2,218톤, 도착 화물 2,144톤이다. 수입은 여객 9,904원, 화물 2,321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 ▲ 임피역 통근 통학생들(1944년 6월 1일) ![]() ▲ 임피역(2004년 사진) 임피역은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역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특히 입구 여닫이의 도르래가 위쪽에 위치하여 드문 구조이다. 일식 목구조를 기본 형식으로 하고 벽체는 시멘트 모르타르 위 페인트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지붕은 슬레이트 박공지붕으로, 전면과 후면의 출입구 부분 박공면을 돌출시켜 형태적으로 강조하고, 전체 입면을 비대칭적으로 구성했다.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목재 창호가 알루미늄 창호로 변경되고 내외부 벽면이 새롭게 도색된 점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건축원형의 보존관리가 매우 양호한 상태이다. 일제강점기 군산선의 철도 역사로 건축된 건물로서 당시 농촌 지역에 건축된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인 건축형식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 ▲ 무인역 시절의 임피역 ![]() ▲ 폐역 직후의 임피역(2008년 촬영) ![]() ▲ 임피역 문서대 ![]() ▲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는 임피역(2021년 촬영) ![]() ▲ 임피역 구내(2021년 촬영) ![]() ▲ 임피역사 및 선로반 도면(철도박물관 제공) ![]() ▲ 임피역사 및 선로반 도면(철도박물관 제공) ![]() ▲ 임피역 화장실 및 창고 도면(철도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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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역과 지역 | |
장항선의 역사와 역들(1) - 원죽역, 기동역, 선장역 | 2025.01.20 |
철도역과 지역 지방선의 폐지는 근본적으로 지역의 쇠퇴로 인해 수요가 감소하고 결국은 철도 운영에 부담을 주어 점차 역 근무 인원 감소, 무인역 그리고 폐역, 폐선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폐선 현상은 철도의 재정적자가 문제가 된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철도선진국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철도 노선이 채 전국에 건설되기도 전에 수요감소로 노선이 폐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가 일본과 비교할 때 독특한 현상으로, 철도망이 완성되기 이전에 도로망이 발전하여 자동차로 수요가 이전되어 철도의 지방 적자선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지방의 수요가 적은 노선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력을 감안할 때 어려움이 있다. 이마저도 지방에 교부되는 지방교부세의 경우 내국세 총액의 법정률이 내국세의 19.24%인데 이 중 매년 약 2조 원 이상이 교통 부문에 투자되고 있다. 특히 도로부문에 집중되고 철도의 지방 적자선의 경우에는 중앙정부와 철도운영자의 책임으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관심 밖의 사항이 된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지방선들이 폐선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1. 장항선의 역사와 역들 장항선의 시작은 경남철도로부터 시작된다. 경남철도의 철도 노선은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하나인 충남선(144.2km)은 천안~온양온천~선장~신례원~예산~홍성~광천~대천~남포~판교~서천~장항 노선이다. 이 노선은 1921년 12월 천안∼온양온천을 시작으로 건설되어 1922년 6월 1일에 이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1931년 8월 1일에 전체 노선인 천안~장항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노선의 건설로 충청도와 전라북도 군산이 바로 연결되어 농수산물의 수송이 활발하게 되었는데, 장항에서 군산까지는 배로 약 15분 거리로 군산항의 이용이 더욱 용이하게 되었다. 1955년 철도 국유화정책에 의해 사설철도가 국유화되면서 충남선이 장항선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 장항제련소가 폐쇄되고 1993년 금강하구둑이 완성되어 2009년 11월 장항과 군산 간의 도선 운항이 중단되었다. 2008년 1월 1일 장항~군산~대야 구간이 개통되고 군산선 대야~익산 구간이 장항선에 편입되었다. 군산선은 군산화물선으로 개칭하면서 군산화물선과 옥구선을 장항선의 지선으로 편입하였다. 구 장항역은 장항화물역으로 변경하고 새 장항역에서 장항화물역까지를 장항 화물선으로 하여 장항선의 지선으로 신설하였다. 1) 원죽역 오서산 자락에 위치한 장항선 원죽역은 1929년 12월 1일 간이정거장으로 영업을 개시한 뒤 1967년 무배치 간이역에서 을종대매소, 1993년에는 차내 취급 역, 2007년에는 그마저도 일반 열차 통과역으로 격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죽림리의 원마을이라는 의미로 ‘원죽’이라 불렀다. 도로교통이 발달한 1980년대 이후에도 21번 국도와 마을 간 거리가 있어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아 2000년대 중반까지도 열차가 정차했다. 가장 많은 승객이 이용하던 1980년에는 한 해 15만 명 이상 이용할 만큼 역 기능이 활성화되었지만, 주민들이 도시로 나가고 마을 앞까지 포장도로가 개통되고 입구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면서 열차 이용객 수도 크게 줄었다. 낮게 깔린 플랫폼, 눈비만 피할 수 있는 간이지붕, 검은색 배경의 역명판, 오랜 기간 열차와의 충돌을 피하며 비스듬히 자라난 향나무가 역사를 구성하는 전부였다. 한편으로는 경관이 뛰어나 2000년대 초 많은 동호인이 철도 사진 촬영을 위해 방문하고 사진 공모전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 ▲ 원죽역사(2007년 폐역) ![]() ▲ 준철도기념물로 지정된 원죽역 역명판 ![]() ▲ 위에서 내려다본 원죽역사(철거 후 모습) ![]() ▲ 원죽역을 지나 오서산을 배경으로 달리는 새마을호 역명판과 향나무가 코레일이 지정한 철도 문화재(준철도기념물)로 등재되었다. 현재는 역사 지붕을 모두 철거하였고, 역명판도 현장에서 철거되어 철도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곳에 답사하러 가면 농사짓던 어르신들이 역사 벤치에 앉아 새참도 먹고 낮잠도 즐기는 모습을 많이 봐왔는데, 역사가 제 기능을 다 하고 철거되었으니 이제 어르신도 역사도 그곳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2) 기동역 1980~1990년대 장항선에는 별도의 건물 없이도 열차가 정차하던 삼산역, 주교역, 주산역, 원죽역, 기동역 같은 소규모 간이역이 있었다. 이용객이 많을 때는 직원이나 주민들이 운영하던 대매소가 있었지만, 이용객이 감소하면서 매표소와 간이매점 역할을 하던 소규모 역사를 철거하고 플랫폼만 남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중 하나가 서천~판교 사이에 위치한 기동역이다. ![]() ▲ [지도 22] 1930년 11월 6일 신문에 실린 판교~장항 간 선로([매일건설신문]) ![]() ▲ 기동역 역명판(2007년 촬영, 2006년 폐역) ![]() ▲ 기동역 플랫폼(2006년 촬영) 조선경남철도 시절인 1930년대 영업을 시작하여 1943년 잠시 폐지되었다가 1971년 임시 승강장을 만들어 30여 년간 마을 주민들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통계에 따르면 1979년에는 연간 10만 명이 넘는 승객이 타고내리기도 했으나 여느 소규모 역사와 마찬가지로 지역 인구가 감소하고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용객 수가 급감하였고 2006년에 폐역되었다. ![]() ▲ 기동역을 통과 중인 열차(2006년 촬영) ![]() ▲ 기동역 플랫폼에서 본 옛 장항선 선로(2006년 촬영) 현재는 기동역 터 위로 4차선 국도가 놓여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장항선 선로는 고가화되고 인근 선로로 직선화 이설되어 역 터에서 멀어졌다. 마을 주민이 크게 줄었고, 남은 마을 주민은 대부분 자가용이나 노선버스를 이용하여 인근 서천이나 군산으로 다니고 있다. 철도교통이 사라지고 도로교통이 빠르게 그 자리를 대체한 경우에 해당된다. 3) 선장역 장항선 선장역은 1985년 임시 승강장 도고온천역이라는 역명으로 개업했다가 1992년 지역명을 따라 선장역으로 바뀌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벤치 몇 개와 역명판 하나뿐인 작은 역이지만 연간 2만 명에 가까운 승객이 도고온천과 인근 연수원을 이용하기 위해 열차를 타고 내릴 만큼 제법 수요가 있었다.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용객도 줄었고, 2008년 1월 1일에는 선장역 주변 선로가 장항선 직선화 공사의 결과로 이설되면서 폐역되었다. ![]() ▲ 선장역 플랫폼(2008년 폐역) ![]() ▲ 선장역을 지나는 열차 장항선 선장역은 다른 간이역과 달리 지역 주민들의 필요보다는 인근 도고온천 이용객들의 편의를 위해 생겨난 역이어서 처음부터 간이 승강장 형태의 역사로 개업하고 유지되어 오다가 온천 이용객 감소와 여행 스타일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폐역된 곳이다. 관광을 목적으로 생긴 간이역이다 보니 역 주변 가로수길과 주변 경관이 뛰어나 경치 좋은 간이역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현재는 옛 도고온천역~선장역 사이에 왕복 4.8km 구간의 아산레일바이크를 운행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1960년대 말 시골 소도시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레일바이크’라는 내용으로 홍보하고 있는데 철도 역사의 역할을 다한 뒤에도 이 지역의 유명 관광명소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관광 목적의 간이역으로 생겨나 20년 남짓한 운행을 마치고 지금도 관광문화자원으로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철도 역사로서 역할을 다한 간이역의 활용 시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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