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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설 | |
건설(8) | 2022.05.24 |
건설(8) 제2절 건설선 공사 상황 평원선 건설 연선 개요 : 본선은 경의선 서포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뻗어나가서 순천, 양덕을 거친 후 다시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에 위치하는 거차령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내려가 성내를 거쳐서 함경선 고원에 도달하는 약 132마일(213km) 길이의 구간이다. 서선의 요지인 평양과 동해안의 요지인 원산을 연결하는 한반도 중부의 제2차 횡단선이기도 하다. 우라니혼(裏日本, 일본의 동해 빗면 지역에 대한 호칭) 항로를 이용하여 일본 측과 이어지며 진남포항을 거쳐서 해로에서 멀리 떨어진 대련·청도 및 상해에까지 이르는 선로로 경제교통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연선의 서부지방은 평야지대가 많아서 농산물이 풍부하며, 장림읍 부근에는 넓은 삼림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천군 및 동부의 고원군 지역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곳곳에 산재하여 금, 은, 무연탄 등 가동 중인 광구도 10여 개나 되었다. 그러나 평안남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지역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인적이 매우 드문 불모지였다. 건설계획 : 본선의 건설에 대하여 일찍이 임시군용철도감부에서 경원선과 비교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일반 민간에서도 1903년 이후 원산, 평양, 진남포의각거류민 유지사이에서 철도 부설운동 등이있었다. 그러나 경원선 건설을 먼저 실시하면서 부득이하게 본선 건설이 지연되다가 제45회 의회(1921년 12월)에서 경비 4,652만 엔으로 1922년도 이후 9개년 사업으로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이후 정부의 전년도 예산 답습 방침과 유럽의 전후 경제적 불황, 관동대지진의 여파 등으로 인하여 1922년도에 서부에 속하는 서포~동남리 구간 4.5마일(7.2km)의 선로 실측 및 용지 매입에만 착수할 수 있었다. 1923~1924년도가 지나서야 1925년도에 동남리~순천 간 19.8마일(31.8km)의 실측을 실시하였으며, 1926년 5월 서포~사인장 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였다. 이어서 제52회 의회(1926년 12월)의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에서 기정 계획선 건설로서 1927년도 이후 지출액 중 4,433만 6천 엔의 공사비를 얻어 1935년도 준공하는 데에 동의를 얻었다. 공사개요 : 건설공사는 동서 양 방면에서 착수하였다. 서부는 초기에 평양 공무사무소 소관이었으며, 1926년 5월 서포~사인장 구간을 3개 공구로 나누고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927년 11월 이를 개통하였다. 이후 순차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여 순천·신창·장림까지 3차례의 구간 개통을 한 후 1931년 10월 장림에 도달하였다. 1933년 8월 장림~양덕 간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1월에 서포~양덕 구간 133.9km를 개통하였다. 또한 동부는 초기에 경성공무사무소의 소관에 속하였으며, 1929년 4월 고원~성내 간을 실측하고, 1931년 4월 구제 사업의 일환으로 같은 구간 30.0km를 3개 공구로 구분하여 노반공사에 착수한 결과 1933년 초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예산 등의 이유로 궤도공사에는 착수하지 못하다가 한참 후인1937년 12월에 개통되었다. 잔여 구간인 성내~양덕 사이에는 백두연봉에서 분기한 낭림산맥이 뻗어 있는 산악지대로 험준한 계곡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고원군 수동·운곡 양 경계면에 있는 600m 정도의 토령(흙으로 이루어진 산의 정상)을 돌파하기 위해서 연장 2,770m의 장대한 터널을 뚫어야만 하였다. 이에 1935년 9월에 미리 직동 공사구간을 설치하고 터널공사에 착수하였다. 터널 굴삭공사에는 자가용 발전소를 설치하였으며, 전기 암삭기를 사용하여 공사를 진행시켰다. 또한 공사 재료 반입을 위하여 성내 측부터 화물 자동차 도로를 개설하는 등 부대 준비 공사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 결과 터널 전후의 노반공사와 함께 1937년 11월에는 무사히 터널공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철도 12개년 계획에 포함된 신규 건설선 공사가 우선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미착수 구간 건설의 착공이 다소 지연되었으나, 서선 지역의 무연탄을 동해 측으로 반출하게 됨에 따라 수송력도 함께 증강할 필요가 있어 갑자기 본선 완성을 서두르게 되었다. 원래 본선의 이 구간은 지형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선로 최급 구배를 50분의 1로 설계하였으나, 수송력 증강을 위하여 양덕에서 고원을 향하는 상행 구배를 60분의 1로 완화하도록 변경하였다. 또한 평양건설사무소장 지휘 하에 조속히 계측을 마치도록 노력한 결과 1939년 4월 전 구간에 걸친 노반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구간은 계측 결과에 따라 5.0km를 늘려서 총 길이 58.7km가 되었으며, 깊은 계곡을 건너는 수많은 대형 교량과 험준한 지역을 통과하는 크고 작은 십여 개의 터널이 있었다. 특히 도계에 있는 거차령터널은 길이 1,160m로 전후에는 6만㎥의 대형 제방을 쌓는 등 공기를 좌우하는 난공사가 많았다. 또한 연선 일대는 인구가 매우 희박하여 천을·거차 정거장 주변에는 단 한 채의 민가도 없을 정도였다. 공사 현장도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건설업자로부터 경원시되어 지명경쟁입찰이 난항을 겪었는데, 결국 특명청부를 받아 밤낮으로 돌관공사를 실시하는 등 청부업자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난공사 구간도 정해진 기한까지 맞출 수 있었다. 궤도공사는 노반 완성 후에 순차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60km에 이르는 구간의 긴급 속성공사로 인하여 횡목, 궤도, 침목, 자갈 등 주요 자재의 수집 및 반입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궤도 요원 확보를 위하여 전 구간 각 보선구에서 300명에 달하는 선로수를 보조 인력으로 동원하여 추위와 싸워가며 밤낮으로 궤도 인연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정월 초순에 천을 정거장 출구 부근에서 동서 양 방면 궤도의 연결식을 거행하였으며, 최소한의 역 설비와 통신 설비를 정비하고 철도 측과 청부업자 측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드디어 1941년 4월 1일에 개통하였다. 4월 1일 양덕소학교 교정에서 거행된 개통식에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 철도국을 대표한 에자키(江崎) 건설과장, 함경남도와 평안남도의 도지사 및 그 밖의 관계자 다수가 참석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서 어려운 공사를 헌신적으로 수행한 니시모토구미(西本組, 미쓰이스미토모건설의 전신) 건설회사의 니시모토겐지로(西本健次郞) 사장에게 철도국으로부터 표창장이 수여되었다. 본선은 1926년 5월 착공 이후 만 16년의 오랜 세월과 약 3,761만 엔의 공사비를 들여 건설하였다. 완성 예정년도보다 5년이나 지연되었으며, 제45회 의회의 동의를 얻은 지 20년이나 경과하였다. 또한 함경선에 비하여 총 길이가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본선은 비록 정세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해도 너무나 긴 세월이 소비되었다. 결국 전선 개통 후 4년 만에 종전을 맞이하였다. 본선의 동부는 공사를 시작할 당시 경성공무사무소 소관이었으나 1935년 8월 성진건설사무소 소관으로 이관되었으며, 서부는 평양공무사무소의 소관이었으나 1933년 5월 이후 철도국 건설과가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신설된 개천파출소가 만포선 건설과 함께 본선 공사를 담당하다가 1935년 8월 이후에는 다시 평양건설사무소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본선은 전 구역을 26개의 공구로 나누어서 순차적으로 노반공사를 추진하였으며, 6차례의 구간 개통을 통하여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 진척 상황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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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설 | |
건설(7) | 2022.05.16 |
건설(7) 제2절 건설선 공사 상황 함경선 건설 선로 개요 : 본선은 반도 횡단철도인 경원선의 종점 원산에서 시작하여 함경도 해안을 따라서 북상하며, 영흥, 함흥, 북청, 성진, 나남 등 주요 도시를 거치며, 청진에서 더욱 북진하여 국경인 회령에 이르는 노선이다. 길주, 회련 등의 탄전지대를 지나며, 해안의 산간벽지를 개척하여 조선 중앙부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약 391마일(약 629km) 길이의 선로이다. 더 나아가 간도, 길림 방면과의 첩로를 형성하고 동북 만주지방의 풍부한 자원을 개척하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다. 이에 앞서 러일전쟁 당시였던 1905년 9월, 일본 육군이 군수품 수송을 목적으로 청진~회령 구간과 윤성~종성 구간에 경편철도를 긴급 부설하였는데, 이것이 본선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선로 예측 조사: 1908년 통감부에서 본선 건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현지 답사대를 파견하여 연선 상황을 관찰하였다. 답사대 일행은 같은 해 6월 11일 경성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원산에 상륙하여, 원산을 기점으로 신포, 청진, 나진, 웅기 등의 항구를 비롯하여 연선 상황 및 배후지 방면의 여객과 화물, 물자 집산 상태를 조사하였다. 이들 지방이 전후의 일시적 호황이 아니라 건전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같은 해 7월 15일 예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제1차 답사를 끝내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1910년 8월 16일부터 10월까지 원산~청진 간 약 333마일(536km)에 대한 2차 답사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1913년 5월, 함경선 국부 조사를 위해서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 조사대를 편성하였고, 같은 해 7월에 두 조사대가 모두 조사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선 1912년 9월 12일 회령~종성 간, 청진 지선 및 함흥~원산 간 철도 선로 조사를 위한 조사대가 편성되어 9월 23일부터 회령~종성 구간 조사에 착수하였다. 10월 6일에 이를 종료하고 11월 17일까지 함흥~원산 구간의 선로도 조사하였다. 건설 예산과 연장 : 예측 조사를 추진한 결과마침내 제31회 의회의 동의를 얻어 원산~영흥 구간 및 청진~회령 구간 총 95마일(152km)을 제1기 건설선으로 하고 1914년도 이후 5개년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하였다. 나머지 대부분의 구간, 즉 윤성~영흥 구간 297마일(478km)에 대해서는 제40회 의회(1917년 12월)에서 1918년도 이후 8개년 사업으로 총 공사비 5,737만 4천 엔의 예산을 투입하는 데 동의를 얻었으나, 정부의 재정 긴축 방침으로 인하여 전자는 제41회 의회에서 2년, 후자는 제46회 의회(1922년 12월)에서 3년이 각각 이월되었고, 이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부득이하게 예산이 감축, 이월되었다. 제52회 의회(1926년 12월)에서는 조선철도 12개년 계획 가운데 기정계획으로 1928년도 준공을 목표로 1927년도 이후의 공사비 지출액 1,801만 7천여 엔의 동의를 얻었다. 공사 상황 : 북부 청진 방면에서는 1914년 4월 선로 실측에 착수하고, 같은 해 6월 청진에 건설사무소(1916년 10월 출장소로 명칭을 바꿈)를 세우고 10월에는 청진 이북의 창평까지 32.2마일(5.18km)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916년 11월 이를 개통하였다. 또한 창평~회령 구간의 노반공사에도 착수하였다. 한편 남부에서는 1914년 4월 원산출장소(1915년 4월 원산건설사무소로 명칭을 바꿈) 소관 하에 원산~영흥 구간 33.8마일(54.5km)의 선로 실측을 종료하고, 이를 두 공구로 나누어 북부와 마찬가지로 같은 해 10월 노반공사에 착수하였다. 영흥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그 근교에 조상의 묘지가 있었다. 고종은 그곳에 가보고 싶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조속히 철도가 개통되기만을 기다렸다. 이에 이 구간을 신속하게 완공하기로 결정하고, 노반을 정비하고 예산 관계상 모두 임시교량을 설치하였으며, 궤도류도 철거품을 재활용하는 등 예산 절감에 힘썼다. 1915년 8월 원산~문천 구간을 개통하고, 1916년 9월에는 문천~영흥 구간을 개통하기에 이르렀다. 1916년 늦은 가을에 고종 일행이 열차를 타고 영흥을 방문하였으나, 고종은 다리가 약하여 묘소까지 가지 못하고 영흥역 플랫폼에서 멀리 영흥천 하류 우안의 울창한 숲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만주철도 위탁경영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남부는 영흥에서 점차 북진하여 신북청까지 약 117km의 노반공사에 들어갔고, 북부는 1923년 10월까지 윤성에서 남하하여 극동에 이르는 약 88km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였다. 본선을 신속하게 완공하기 위하여 1920년 2월 중간 지점인 함경북도 성진에 공무사무소를 신설하고, 길주~단천 간 약 85km를 소관 구역으로 삼고 노반공사에 착수하였다.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국가의 재정이 축소되면서 철도 건설 또한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일부 공사가 중지되었으며, 1924년 2월에는 성진공무사무소를 폐지하고 원산 공무사무소(1920년 2월 건설사무소로 변경)가 파출소로 변경되는 등 본선의 건설공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나 중지 구간은 그 후 2년 이내에 공사를 재개하였으며, 나머지 구간도 순차적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남부에서는 반송~군선 구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천까지 전체적인노반공사에 착수하였으며, 북부에서는 1926년 10월까지 극동~길주 구간의 노반공사에 들어갔다. 만주철도 위탁경영에서 총독부 직영으로 전환된 직후인 1925년 10월, 원산 공무사무소가 폐지되고 경성공무사무소로 소관이 이관되자 사무소와 공사 현장이 점차 멀어지면서 상호간의 제반 연락 및 공사 추진에 있어 여러 불편한 점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함경남도 군선에 경성공무사무소 파출소를 설치하고 공무사무소장의 권한 가운데 일부를 대행시켰다. 개통의 경우, 남부에서는 1914년 8월 원산~문천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노반공사의 준공에 맞춰 순차적으로 구간을 개통하여 1927년 12월까지 원산~반송 간 256.3km를 개통하였다. 북부에서는 1916년 11월 청진~창평 간의 구간 개통을 비롯하여 1917년 11월 청진~회령 간 93.4km를 전선 개통하였으며, 이어서 윤성 이남에 속하는 군선까지의 250.6km를 1927년 12월까지 구간 개통하였다. 이 사이 중부의 길주~단천 간 84.7km는 1924년 10월 이미 중부선으로 개통되었으나, 북부선과의 연결이 지연되어 일부 구간을 자동차로 연결하거나 중도에 배편을 이용하는 등 북부와 중부의 연결에 큰 불편을 겪었다. 마침내 나머지 구간인 반송~군선 간 23.9km가 준공됨에 따라 1928년 9월 1일 공사 개시 후 15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거쳐 원산~회령 간 전 구간인 624.2km가 개통되었다. 이 선로는 주로 해안지역을 지나기 때문에 어려운 공사가 많았으며, 특히 거산(1,382km)·고참(1,609m) 등의 대형 터널공사와 성천강·북청 남대천·단천 남대천 등의 대형 교량공사, 산악 지대와 해변을 지나는 구간에 축조한 장대하며 높은 해안 축조, 호안 옹벽공사 등은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다. 해안의 험난한 지대의 대규모 폭파를 위하여 당국에서는 처음으로 칼릿(Carlit) 폭약을 사용한 폭파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터널공사에 대규모 발전소를 건설하는 등 새로운 기술과 첨단 시설 투입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공사 자재의 수송을 위하여 각 공사의 청부업자가 각각 현장의 일부에 경편궤도를 부설하였으며, 우차·마차 및 화물 자동차 등 모든 운반 기구를 동원하였다. 특히 육상 교통이 불편한 중남부 지역의 해안 부근의 경우 원산~성진 구간의 해상에 원산공무사무소 소속의 구환(소형 증기선)을 투입하여 시멘트 및 기타 공사 자재를 적재한 단평선(團平船)을 예인하여 공사 현장 부근에 양륙하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21년~1925년 경에는 조선 내 시멘트의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에 함경선 건설공사에는 주로 일본의 오노다 시멘트나 아사노(淺野) 시멘트 회사 제품을 직접 해상을 통하여 공사 현장 근처의 가장 가까운 항까지 운반하였다. 동해 연안에는 원산·서호진·신포·차호·성진 및 청진항을 제외하면 좋은 항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해륙 교통이 불편한 중앙부의 공사 현장의 경우 양화, 신창, 군산 등 먼 해안에 30~50m 길이의 목조 가교 및 시멘트 임시창고를 축조하고 앞바다에 정박 중인 화물선에서 단평선으로 운반하여 임시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발췌검사를 거쳐서 품질을 확인한 후 각 공사 청부업자에게 지급한 공사 현장도 있었다. 이 밖에도 물가와 임금의 폭등 및 경비 긴축에 따른 예산 편성의 어려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공사 지연 등 장기간의 공사 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변방 한촌 지역 가운데는 공사가 한창 진행된 시기에 일시적이지만 전에 없던 활기를 띤 곳도 있었다. 본선이 전부 개통된 1928년 9월 1일은 대재해가 발생한 날이기도 하였다. 함경선 일대는 이틀 전부터 태풍과 호우로 인하여 하천이 범람하고 대형 산사태 등이 발생하여 교통이 단절된 지역이 속출하였다. 경성에서 출발한 첫 열차는 당일에 청진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탈선하여 며칠이나 도착이 늦어졌다. 수해로 인한 피해는 청진~회령 구간이 가장 심각하였으며, 고무산역은 대형 산사태로 인하여 구내 전체가 2~4m나 매몰되면서 긴급 복구에 수많은 건설·보선 종사원이 투입되었다. 전선 개통식은 10월 1일 나남의 기병연대 구내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본선 건설은 46개 공구로 나누어 노반공사를 실시하였고, 23차례나 구간 개통을 실시하였다. 공사비는 나머지 공사를 포함하여 약 9,141만 엔에 달하였다. 본선 각 구간의 공사 진척 상황은 다음과 같다. ![]() 지선 건설 : 본선 건설과 함께 각 지선 또한 순차적으로 건설되었는데, 그 가운데 회령탄전을 개발하는 회령탄광선은 1928년 8월, 함경남도 오지인 풍산·갑산 방면을 연결하는 북청선은 1929년 9월, 이원철산 광석을 반출하는 광산선 및 차호선도 마찬가지로 1929년 9월 각각 개통되었다. 또한 천내리에서 시멘트를 개발하기 위하여 부설한 오노다 시멘트회사 천내리선은 1927년 11월 이후 이 회사의 건설선을 빌려서 영업하였다. 각 지선의 구간, 거리 및 기타 개요는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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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설 | |
건설(6) | 2022.05.10 |
건설(6) 제2절 건설선 공사 상황 평남선 및 평양탄광선 건설 평남선건설: 본선은평양~진남포구간을잇는노선으로, 처음임시군용철도감부가 부설계획을 세우고 1905년 8월 측량을 실시하여 용지의 일부를 매수하였으나 선로를 부설하지 못한 채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 후 일본 자본가 사이에서 대동강의 수력을 이용한 전력회사를 세워 평남 가도 상에 전기철도를 겸영할 계획도 있었으나, 이 또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08년에 이윽고 국유철도를 부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공사비는 제24회 의회(1907년 12월)에서 188만 6천 엔이 계상되었으며, 1908년도 이후 3년으로 나누어 지출하는 데 동의를 얻었다. 선로 경과지는 평양에서 평남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뻗어나가 태평에 이르렀으며, 대동강변을 따라 약 1.2마일(약 2.0km)을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지양을 지나 진남포의 동단에 도달하는 코스로 총 선로 길이는 34.4마일(55.3km)이었다. 1909년 7월 용지 매수에 착수하고 선로는 5공구로 나누어 같은 해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2월 평양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노반공사는 같은 해 5월까지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궤도를 부설하는 동시에 도상 정비에 노력하여 10월 16일 전선 개통을 맞이하였다. 본선은 속성공사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소교량 및 구교를 제외하고 비교적 큰 교량·하수구·흙막이 등은 모두 임시구조로 하고 정거장 설비도 영업상 크게 지장이 없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개통 후 1910년 말부터 교량 및 기타 개축에 들어가 1913년 말에 대부분 마무리를 지었다. 진남포 정거장 확장 및 해륙 연락 설비공사가 1914년에 거의 완성되고 서선(西鮮, 평안·황해도)의 운수교통에 신기원을 열었다. 본선의 건설 공사비는 약 138만 엔이었다. 평양탄광선 건설 : 본선은 경의본선 대동강역에서 분기하여 승호리에 이르는 14.5마일(23.3km)의 단거리선으로, 연선에 매장된 무연탄 개발에 이용되었다. 초기에는 채탄장에서 대동강 연안까지 궤간 2척 6촌의 경편 마차 철도를 부설하여 2량 내지 3량의 탄차를 끌고, 수상으로 겸이포 또는 진남포로 수송하는 방법으로 무연탄을 반출하였다. 1909년 한국 정부 노상공부는 공사비 5만 7천 엔을 투자하여 대동강신호소(지금의 대동강역) 부근에서 분기하여 미림에 이르는 약 7여 마일(11km)의 전용철도를 부설하고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열차 운행을 위임하였으나, 총독부에 철도국이 설치되면서 소관이 이관되었다. 당시 연선이었던 사동은 평양 탄전의 중심지로서 이미 하나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선은 1911년 9월 1일 이후 평양~사동의 6.6마일(10.7km) 구간에 일반 여객 운수 취급을 개시하고, 이어서 오노다 시멘트 제조회사가 전용 경편철도선으로 부설한 미림~승호리 구간 7.2마일(11.6km)을 1918년 5월 건설비 83만 8천여 엔에 매입하였다. 그 후 보완 개량공사를 거치면서 영업 구간이 다소 연장되었고, 평양~승호리 구간이 평양탄광선으로 일반 운수 영업을 개시하였다. 진해선 건설 건설계획 : 본선은 진해의 해군 요항과 경부 및 마산선과의 연결을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1910년 7월 통감부 철도관리국과 참모본부에서 파견된 육군 대좌 나카지마 마사타케(中島政武)가 공동 답사한 후, 이어서 같은 해 10월 예측을 실시한 결과 제40회 의회(1917년 12월)에서 부설이 결정되었다. 공사비 241만 7천 엔으로 처음에는 1918년도 이후 5개년 사업으로 계획하였으나, 만주철도 위탁경영 하에서 1920년에야 실측을 종료하고, 곧바로 초량공무사업소 소관 아래에서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 후 물가 폭등에 따라 1922년도에 36만 8천 엔, 1923년도에 159만 2천 엔의 예산을 추가로 증액하면서 1924년도까지 3년 연장 동의를 거쳐서 공사를 지속하였다. 공사개요 : 본선은 진해와 가까운 장벽산맥에 장대한 장복산터널을 뚫고 지나서 상남 부근의 평야를 거쳐 북진하다가 진창 가도와 교차하여 동해 정천, 무군천 등의 교량을 건너서 마산선 창원에 도달하는 연장 12.8마일(20.6km)의 구간이다. 장복산터널의 길이는 1,811m로 당시 조선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로, 1921년 12월 남구에서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1월에 북구에서도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전력에 의한 수지식 전기 착암기로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약 2년 후인 1924년 3월 26일에서야 도갱이 관통되었다. 전기 착암기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마침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함경선과 마찬가지로 예산이 연기되어 부득이하게 작업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1925년 12월 다시 착수하여 이듬해인 1926년 10월 노반공사를 계속 진행시켰으며, 육군 철도연대의 노력으로 궤도 부설을 끝마친 덕분에 같은 해 11월 11일에 전선이 개통되었다. 육군 철도연대의 활약: 궤도 부설은 지바철도 제1연대 및 쓰다누마(津田沼) 제2연대에서 파견한 총 600명의 연습 임시철도대 병사를 대상으로 한 광궤 철도 부설 실시 작업훈련의 의미도 있었다. 40일간의 예정으로 선발대 90명이 8월 22일 창원에 도착하였으며, 본대 이케다(池田) 중좌 이하 500여 명이 8월 30일에 도착하여 다음날인 31일 창원에서 진해 방향으로 작업에 착수한 결과, 병사들의 질서정연한 행동 하에 공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본선의 건설은 쓰시마 해전으로 유명해진 요항 진해를 뒤편에서부터 연결 했을 뿐만 아니라 철도연대가 일부 건설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무더운 여름철 날씨 속에서도 엄격한 규율 하에 연일 10여 시간씩 작업에 종사하는 등 병사들의 헌신적인 고생이 뒤따랐다. 이들의 상황은 철도국원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9월 21일 야간작업에서는 교량이 낙하하여 구리타 도요고로(栗田豊五郞) 상등병 외 3명이 순직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음에도 작업에 매진한 결과 10월 12일 모든 작업을 종료할 수 있었다. 철도연대는 10월 14일 진해를 떠나 귀대하였다. 본선의 건설 공사비는 373만 6천 엔이었으며, 그 중 철도연대 위탁 공사비는 1만3천 엔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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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5) | 2022.05.02 |
건설(5) 제2절 건설선 공사 상황 경원선 건설 본선의 부설권 문제 : 본선은 평원선과 함께 반도의 동서 해안을 연결하는 횡단선을 이루었으며, 동해의 항로를 거쳐 일본과의 교통로를 형성하였다. 또한 더 나아가 함경도 동쪽 변방지역을 거쳐서 두만강 연안에 이르는 조선 만주 교통의 주요 간선로의 일부로,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 본선은 1896년 프랑스인이 경의·경목(경성~목포 구간) 양 철도와 함께 그 부설권을 조선 정부에 요구함으로써 점차로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서구열강의 요구가 점차 심해지는 가운데 일본 또한 부설권 획득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3년 부설권 획득을 둘러싼 각국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대한제국과 일본 정부 간에 본선의 건설 출자 계약이 체결되었다. 군용철도 부설과 그 중지 : 때마침 러·일 국교가 단절된 탓에 일본 정부는 군사상 필요에 의하여 1904년 8월 경성~원산 간 군용철도 부설을 결정하였다. 또한 경성에서 준양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구간에 철도를 부설하고 필요에 따라서 두만강 연안까지 도달하도록 노선을 연장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에 통고하였다. 이와 동시에 육군이 측량을 시작하고, 같은 해 11월 임시군용철도감부가 용산과 원산에 건축반을 설치한 뒤 각각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 노선을 서둘러 건설할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 밖에도 여러 장애 요인이 발생하자 예산 관계상 1907년 9월 통감부 철도관리국에 이를 인계한 후 일단 공사를 중지하였다. 그 후 다시 본선 부설이 제기되어 1909년 5월 기존 노선을 따라서 다시 계측하는 한편, 평원선(평양~원산 구간)과 비교 조사를 실시하였다. 본선의 건설 : 당시 일본에서는 전후의 재정 상태를 감안하여 공사가 비교적 쉬운 호남선을 먼저 부설한 후 경원선 부설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북선지역 물자를 중부로 수송하는 일 또한 시급하였기 때문에 두 노선을 동시에 부설하기로 결정하고 제26회 의회(1909년 12월)의 동의를 얻어서 1910년 4월부터 실측에 착수했다. 용산에서 의정부, 철원, 평강을 거쳐 조선 배량산맥 삼방관의 험준한 지역을 지나 석왕사를 거쳐서 원산에 이르는 약 138마일(223km)의 노선을 선정하고, 같은 해 6월 용산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여 10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당초 본선의 건설 공사비는 약 1,378만 엔으로 1910년도 이후 11년간 지속적으로 지출할 예정이었지만, 한일합병 이후 부설을 서두르면서 이듬해인 제27회 의회의 동의를 얻어 공사 기간을 1911년도 이후 5년으로 단축하였다(이후 제31회 의회에서 1년 연장되었다). 이리하여 1911년 3월 원산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실측에 착수하였고, 10월에 원산 측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점차 용산·원산 양 방면에서 공사를 진행하였다. 용산~세포 구간은 8공구, 세포~원산 구간은 7공구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노반공사를 진행시켰으며, 이와 동시에 정거장 설비와 궤도 부설을 시행하였다. 가끔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각 구간이 준공될 때마다 8회에 걸쳐 양 방면에서 순차적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1914년 8월 16일 세포~고산 구간 16.2마일(26.0km)의 준공을 끝으로 전선 138.2마일(222.3km)의 영업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공사 현황 : 본선 중 용산~복계 구간(약 77마일/124km) 및 고산~원산 구간(약 28마일/45km)은 험준한 지역이 2, 3곳 정도 있었으나, 지세가 대체적으로 평이하였다. 그러나 복계~고간 구간(약 33마일/53km)은 철악산맥이 가로지르고 있어 산악이 험준하고 수목이 우거진데다 인적이 드문 계곡이 많아 폭도나 맹호가 출몰하기도 하여 측량원이 작업 중에 때때로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였고, 공사 또한 쉽지는 않았다. 특히 세포~고산 구간(약 16마일/26km)은 완만하게 돌아 원산 쪽으로 흐르는 삼방천의 깊은 계곡으로 토공·교량·구도 등 난공사가 많았으며, 크고 작은 터널이 15개나 이어져 있어 공사자재의 운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공사에 소요된 총 공사비는 1,282만 4천 엔이며, 공사 진척의 개요는 다음 표와 같다. ![]() 호남선 건설 건설계획 : 본선은 대전~목포 구간을 잇는 선로로, 그 연선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 3도 일대의 지방은 예로부터 3남이라 불려왔다.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과 수산물, 여러 공예품이 풍부한 한반도의 보고로 예로부터 지역 주민과 외지인들 사이에서 개발 수단이 계획되었으나 교통 운수 시설이 정비되지 않아 풍요로운 자원을 개척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선 부설은 이러한 개발을 목적으로 1898년 6월 여러 경위를 거쳐 한국 정부와 부설권에 관한 협상이 체결되었다. 그 후 통감부시대에 제26회 의회(1909년12월)의 동의를 얻어서 경원선과 함께 공사를 시작하였다. 건설 노선은 경부선 대전에서 시작하여 가수원, 두계를 거쳐 논산, 강경평야를 지나 금강 하구와 전주평야의 동쪽을 따라 이리에 이르렀으며, 여기서부터 평야를 횡단하여 김제평야의 동쪽으로 나아가 전라남북도 경계에 우뚝 솟은 노령을 통과하여 광주평야로 들어갔고, 송정리, 영산포 등의 여러 읍을 지나 목포항에 도달하였다. 총 길이는 간선 162.3마일(261.1km)과 별도로 이리에서 군산항에 이르는 15.3마일(24.7km)의 지선을 합한 177.6마일(285.8km)로, 비옥한 평야가 많은 금강·만경강·동진강 및 영산강 등의 유역을 지나기 때문에 식량 자원 개발상 매우 중요한 선로였다. 초기의 본선 부설은 제26회 의회에 의하여 1910년도부터 11년간 계속되는 사업으로서 공사비 약 1,253만 6천 엔을 지출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그 개통이 매우 요원했었기 때문에 최대한 서둘러 영업을 개시한다는 방침 하에 터널이나 대토공 등의 난공사는 뒤로 미루고 정거장 설비도 간략하게 하였으며, 교량이나 기타 공작물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시구조로 하여 7년 안에 개통시키도록 계획을 세웠다. 공사 개요 : 본선의 속성공사는 대전~사가리 구간 및 군산 지선과 사가리~목포 구간으로 양분하고, 전자는 다시 8공구, 후자는 5공구로 나누어 1910년 5월 대전 방면부터 측량을 시작한 후 같은 해 6월 대전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여 10월부터 공사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 체결과 함께 한반도 개발을 위한 본선 부설이 더욱 시급해지면서 제27회 의회(1910년 12월)의 동의를 거쳐서 건설비 지출 연한을 1911년도 이후 5년으로 단축하였다. 이에 따라 1911년 3월 목포에 건설사무소를 설치하고 목포~사가리 구간의 측량을 개시하는 한편, 같은 해 10월 목포 방면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후 각 공구별로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911년과 1912년에 대전 방면에서 큰 수해가 발생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노반 준공 후 순차적으로 구간 영업을 실시하여 공사에 착수한지 약 5년이 지난 1914년 1월 11일 정읍~송정리 구간 35.5마일(57.1km)의 준공을 마지막으로 전선이 영업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사를 서두른 탓에 곳곳마다 불완전한 부분이 있어서 건설 잔여 공사 계획에 따라 1912년 10월부터 순차적으로 개축을 실시하였다. 이 공사에 소요된 총 공사비는 약 1,317만 5천 엔이었다. 본선의 공사 진척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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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철도의 건설 | |
건설(4) | 2022.04.26 |
건설(4) 제2절 건설선 공사 상황 압록강가교공사 가교 계획 : 압록강은 조선과 만주 사이의 국경을 흐르는 800km 길이의 강으로, 장백산맥에서 시작하여 여러 지류가 만나 용암포 부근에서 황해로 흐른다. 과거 상류 수백 km 구간에는 뗏목이 다녔으나, 수력발전용 댐인 수풍댐이 건설된 이후 점차 그 수가 감소하였다. 홍수기인 매년 7, 8월과 강이 얼어붙는 겨울철 4개월 등 1년의 절반 정도는 수운을 이용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며, 봄철 해빙기에는 물위의 얼음덩어리가 부딪히면서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바로 이 압록강 사이에서 조선과 만주를 이어주는 철도 교량이 만포진, 수풍, 신의주 3곳에 있는데, 그 가운데 제1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경의선에 이어 건설된 압록강철교이다. 압록강철교의 가설 계획은 이미 1904년 2월에 임시군용철도감부가 수립하였으며, 가설지는 만주 안동현의 하류 약 0.6마일(1.0km) 지점에 선정하였다. 가설지 부근은 평상시 조수간만의 차가 약 13척(4.0m)으로, 유속은 홍수기의 일본 하천과 비슷하며 강바닥이 연약하여 유심(流心)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강바닥의 고저도 일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교량공사는 1906년 3월 경의선 개량공사가 시행됨과 동시에 설계에 착수하였다. 당시 피일교는 이미 준공된 상태였으며, 같은 해 7월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이관된 직후 이 교량의 설계 가운데 와렌트러스 200척×6연+300척×6연을 가설하였다. 교각의 기초에는 모두 잠함공법을 적용하였고, 계속해서 세부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선박의 항행에 적합하도록 중앙부에 개폐식 회전 거더항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영국의 구축함이 압록강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영국이 요청한 결과라는 설도 있다). 교량의 중앙은 단선 철도 노선으로 하고 양측에 폭 8척의 보도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복선을 계획하였으나 예산 관계로 단선이 되었다. 양측의 보도는 당시 일본의 데라우치 육군 장관이 비상시에 대포를 통과시킬 생각으로 이후에 추가를 명령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1909년 3월 설계를 끝내고 예산 총액 약 233만 엔을 계상하였으며, 1909년도부터 1912년도까지 3년간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1909년 8월에 조선 측에서 교각 기초공사에 착수하였으나, 공사 중 가교 문제에 관하여 외무성과 청국 간에 수차례 교섭한 결과(일례로 가교협정 성립 전에 착공한 것에 대하여 북경 정부가 항의를 제기하여 큰 문제가 되었으나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 공사의 조정에 의해 해결되었다) 1911년 3월에 동의를 얻어서 안동현 측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청일 각서는 같은 해 4월 4일에 조인되었다. 공사 상황 : 이 공사를 위하여 1909년 6월 신의주에서 압록강출장소(1910년 2월에 신의주건설사무소로 명칭을 변경)를 설치하고, 직영공사로 1909년 8월 공사에 착수한 뒤 1911년 10월 말 준공까지 2년 2개월이 소요되었으나, 결빙 및 강우 기간을 제외한 실제 공사기간은 불과 1년 4개월이었다. 공사에 동원된 연간 인부 수는 51만 명, 공사비 총액은 175만 엔(그 중 공비 37만 엔)으로 예산 총액에 비해 약 58만 엔이 절감되었다. 이러한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참신한 잠함공법과 적절한 기계 응용 덕분이었다. 군용철도 완공 당시에는 조선과 만주 사이에 조선 측의 신의주 화물역과 안동현 측의 소잔교를 왕복하는 작은 증기선이 왕래하였으나, 겨울철에는 하천 표면이 얼어붙어 자유로운 빙상 교통이 가능하였다. 여름철에는 하루에도 수십 척의 거대한 뗏목이 다녔으며, 양쪽을 오가는 정크선(소형 범선)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양측 연안은 사람들로 상당히 붐볐다. 선정된 가교 지점은 교량 건설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다. 양 교대의 거리는 3,098척, 경간은 남측부터 200척×6련, 그 앞이 300척×6련이며, 9련 째의 중앙에 회전용 교각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300척의 트러스가 다리 축에 직각을 이룰 때까지 회전하였다. 따라서 이 사이를 정크선이 돛대를 세운 채 통과할 수 있었다. 거더는 미국 기사 클로포드의 설계에 맞춰 와렌트러스로 하였다. 아메리칸 브리지 컴퍼니가 외주 제작한 부품을 인천까지 배로 수송한 뒤 다시 열차로 현장까지 운반한 뒤 스테이징 위에 설치한 골리앗 크레인을 이용하여 현장에서 조립하였다. 교대와 교각은 조선철도국이 설계하였다. 구체에는 절석 쌓기, 교대 기초에는 콘크리트 말뚝이 사용되었으며 교각 기초의 경우 이시카와지마(石川島) 조선소의 요청에 따라 철강 잠함(케이슨) 내부에 콘크리트 속채움을 실시하였다. 회전 교각은 직경 29척의 원형, 그 밖의 교각은 중앙부가 사각이며, 양 끝단이 반월인 소판형으로 길이 47척, 폭 13척 및 폭 15척 6촌의 2종으로 하였다. 공사에 사용한 시멘트는 미국에서 수입하였다. 잠함 공기탑은 노무자용과 재료용 두 가지가 있었는데, 재료용은 독일제로 꼭대기 부분에 8마력의 권양용 직류 모터를 장착시켰으며, 버킷(용적 1.4입 방척)은 링크 체인을 상하로 움직였다. 수심이 얕은 교각 제1호 또는 제6호의 경우 주위에 말뚝을 박고 시트파일을 이용하여 흙막이 공법을 실시하였으며, 축도 위에 잠함을 설치하였다. 수심이 깊은 교각 제7호 또는 제12호의 경우 말뚝박기 비계를 만들고, 그 위에서 잠함을 조립한 후 잠함공법을 이용하여 잠함을 지반 위까지 끌어내리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길이 18척, 직경 2촌 정도 크기의 볼트 8개가 지지하는 금구 18조가 준비되었고, 말뚝에는 말구(末口) 1척, 길이 39척짜리 태백산 낙엽송이 사용되었다. 목재류는 상류 부근에서 조달하였다. 공사는 철도국 직영으로 시행되었으며, 직할 청부업자는 하자마구미(間組), 잠함공사 인부로는 천진지역 고력두(苦力頭)(참고 6)인 양국동(楊國東)이 이끄는 중국 잠함부가 담당하였다. 조선인보다 급료가 훨씬 낮은데다 경험도 풍부하여 최대 기압 28lb/□〃의 잠함 내 작업도 문제없이 해냈다. 잠함 공기는 침하 개시부터 기초 완료까지 16일, 잠함 기초 공비는 392,638엔이었다. 일본은 1909년 요코하마 축항공사 때 최초로 압기잠함공법을 사용하였는 데 뒤를 이어 조선철도에서도 이 공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먼저 시범적으로 경의선 청천강 교량 200m 2련의 교각의 기초 침하에 시도하였으며, 이것이 성공하자 자신감을 갖고 압록강 가교공사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다. 1911년 7월 강형 조립 중에 대홍수를 만났다. 당시 회전교를 제외한 트러스의 설치는 모두 끝난 상태였으나, 7월 12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18일까지 이어지면서 수량이 크게 불어났다. 떠내려 온 길이 200~300척 정도의 거대한 뗏목이 회전교의 교각과 충돌하면서 스테이징의 일부가 붕괴하였고, 그 과정에서 트러스의 일부가 무너지고 회전장치의 부품도 유실되었다. 외주 제작에는 약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총독부로서도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안동현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하류의 용암포 가도 부근에서 기적적으로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뗏목 위에 있던 회전용 샤프트를 발견하였다. 이 샤프트는 청일전쟁 당시 포획한 군함 정원·진원의 조타용 샤프트와 거의 비슷하였다. 그리고 붕괴 낙하한 강형은 물이 빠진 후 약 200m 하류에서 발견되어 대부분 회수하였다. 덕분에 불과 1만 엔의 보충재 구입비와 1개월간의 보수 기간을 거쳐 국제 가교공사가 예정 기한 내에 준공될 수 있었다. 회전교는 평일 오전, 오후에 한 차례씩 직각으로 열렸으나, 풍속 25m 이상 일 때는 정지하였다. 회전교의 개폐를 위하여 12마력의 석유 발동기를 설치하였으나 45도 개폐에 불과 2~3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하여 수동식으로 변경하고, 발동기는 예비 동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크선의 돛대가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교량의 보존을 생각하여 1934년 3월 31일자로 회전을 폐지하였다. 원래 하천을 국경으로 하는 경우 어느 지점을 분계로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가장 수심이 깊은 곳을 경계로 한다. 압록강 가교는 착수 당시 제9호 교각의 수심이 가장 깊었기 때문에 이를 경계로 회전교를 설계하였는데, 후에 홍수로 인하여 제11호 교각 부근의 수심이 가장 깊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원래 이 가교공사는 조선 측에서 만주철도 측에 연락할 목적으로 설치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가교에 대한 모든 책임은 조선 측에 있으며, 교량의 북측인 안동현 측 교대 석적 북단까지의 건설과 보수를 모두 책임지도록 협정하였다. 압록강철교의 완공과 동시에 안봉선의 광궤 개량공사 및 신의주·안동의 신역사도 준공되어 드디어 조선과 만주를 연결하는 철도의 시운전이 시행되는 날이 다가왔다. 1911년 11월 1일 조선과 만주의 관계자들이 모여 먼저 압록강 남안에서 성대한 개통식을 거행한 후, 이어서 안동 측에서 만주철도가 주최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한 공사 관계자는 만주철도의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신의주역에 들어왔을 당시의 감격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압록강철교는 당시 동양 최고의 철교로, 국경의 명물이 되었다. 그 이유는, (1) 압록강이 국제 하천인 점 (2) 교량 길이가 당시 가장 길었던 점 (3) 형(桁)의 일부가 회전식이었던 점 (4) 형(桁)의 설계 제작을 미국이 담당한 점 (5) 기초 시공에 일본 최초라고 할 만한 압기잠함공법을 사용했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 참고 6) 고력두(苦力頭) :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중국과 인도의 육체노동자(짐꾼, 인력거꾼, 광부 등)를 가리켜 고력(苦力) 또는 쿨리(Coolie)라고 불렀다. 고력두는 이러한 고력들의 조합인 고력방의 운영자로, 고력의 임금 중 일정액을 받는 대신 취직과 생활 전반을 책임졌다. - 역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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